2021. 9. 15. 18:51ㆍThoughts

벌써 2주가 다 되어간다. 지난 2일은 탄소중립위원회 해체를 요구하는 공대위의 첫 기자회견이 있는 날이었다. 뉴스에는 '각종 환경단체'라고 아주 짤막하게 갈음됐지만, 이 자리에는 소위 '환경단체' 소속이 아닌 비정규직 발전노동자, 청소년 인권운동가, 빈민단체 상근자 등 다양한 성격의 단체가 함께했다. 나도 이현정 소장과 함께 이 자리에 있었다.
이날 제기된 문제의식의 핵심 요지를 다시 짚자면,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탄소배출 절감 전략을 토론하자는 자리에 주요한 당사자인 노동자와 논민, 빈민이 없다면 이 논의는 얼마나 정당할 수 있냐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동의를 얻는 것인 양 '모양'만 짜 맞추어 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어렵지 않은 이유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탄소중립 시나리오도 강은미 의원이 호되게 지적했듯 매우 불충분하고, 또 기만적이었다. 논의 구조도, 결과도 모두 이 모양인데, 아무리 훌륭한 분이 시민사회의 몫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을 것이다. 탄중위에 참여한 민간위원들에게 '(정부의) 알리바이가 되지 말라'라 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정의당의 이야기로 넘어와 보자. 정의당 대통령 경선에 나선 모든 후보가 기후위기의 시급성과 '민주개혁연대'가 시효를 다했다고 입을 모았다. 정치개혁이나 선거법 개정, 당의 확장성 등을 이유로 입장 자체를 내길 망설였던 지난 몇 년에 비해서는 분명히 나아졌다. 오랫동안 범여권 도식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던 당이 이제 '야권'으로 묶이기 시작한 것도 자연스러워진 것은 분명하다. 다행인 일이다.
하지만 '기후위기가 시급하다'거나 '민주-개혁연대는 끝났다'라는 선언만으로 그 진정성을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돌이켜보면 참 아이러니하지만, 한국이 선진국의 일원으로서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 첫 대통령은 이명박이었다. 그 일론 머스크조차 기후변화 대응이 시급하다는 주장에는 망설임이 없다. 그렇다고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어제 오전, 정의당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한 김윤기 후보도 내가 있었던 곳과 같은 장소에서 탄중위 해체를 요구하는 1인시위에 참여했다. 나는 이 사진이 피켓에는 적히지 않은 중요한 의미까지 함께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모두 입을 모아 말하는 '민주개혁연대'의 종언에 대해서도, '기후대통령'이 될 비전에 대해서도 김윤기 후보가 여러 후보들 중 가장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하는 과감한 대안이 가장 뚜렷하고 솔직하기 때문은 물론이다.
'민주개혁연대'가 민주당과의 선거연대나 의회 안에서 공감대를 찾아가는 과정만을 좁게 말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회운동의 의사결정 참여 과정을 요식화한 '협치'와 '합의'의 탈을 쓴 비민주적 거버넌스도 '개혁연대'의 어두운 과거임에 분명하다. 탄중위가 처음은 아닌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전 대표가 수장으로 들어갔던 경사노위도, 성소수자의 권리를 증진하는 것에 있어서도, 언제나 '합의'와 '협치'는 지금 당장 필요한 것들을 미루거나 외면하는 알리바이였다. 민주노총 양경수 위원장까지 구속된 지금, 연합정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당장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내가 함께했던 경찰과의 잠깐의 대치 상황에서는 유력 언론의 카메라도, 마이크도 없었다.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일행은 사유지를 불법 점거한 채 입주자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존재로 묘사되었을 것이다. 오늘의 1인시위 현장 역시 아마 언론의 카메라도 마이크도 없는 것에는 마찬가지일 것이겠지만, 김윤기 후보는 아랑곳 않고 없어져야 할 탄중위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탄중위 해체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함께 했다.
덧. 함께 첨부한 사진은 탄중위가 입주한 건물에서 관리인들과 잠시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 찍힌 것이다. 이 건물의 로비는 볼일이나 약속이 있다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거나 사람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도 되는 곳이었지만, 미리 요구안을 받겠노라 확인받았던 탄중위 담당자가 늑장을 피우는 사이 우리는 '사유지를 침범해 불법집회를 벌이는 자들'로 낙인찍혔다. 큰 소동까지는 없었지만 인근 경찰서의 형사까지 출동한 마당에 나는 어떤 종류의 오싹함을 느꼈고, '사유지'를 들먹이는 그들을 보고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을 했다. 많은 이들이 부동산과 집 문제로 시름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땅이 모두의 것이라는 이야기에도 머뭇거리고, 누군가가 필요 이으로 땅을 갖고 있다는 말에는 주저하게 되는 것일까?